프로코피에프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리스트와 쇼팽,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와 고전, 현대 및 프랑스 작곡가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포함한 피아노로 가능한 모든 솔로 및 협주곡 레퍼토리가 그의 손끝에서 연주되었다. 그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음악 만들기를 사랑했다. 그 만큼 실내악과 앙상블 작업은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가장 먼저 소비에트 시절 함께 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앙상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이들은 새로운 러시아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해낸 트로이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 그와 절친한 사이었던 벤자민 브리튼과의 연주도 60~70년대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이벤트이고,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가곡 반주자(후일 페터 슈라이어와도 함께 했다)로서의 활동 또한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음악가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 특히 후배 피아니스트인 졸탄 코치슈,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등을 각별히 아끼며 함께 듀오 리사이틀도 열었고,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첼리스트 나탈리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 함께 실내악 연주와 듀오 리사이틀 또한 자주 가졌다. 그리고 전문 실내악 단체인 보로딘 4중주단과도 많은 연주회를 했다. 거구의 몸으로 청중을 압도했던 그는 말년에는 홀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악보를 앞에 놓은 채 건반 옆에 단 하나의 조명만 놓고 연주하는 분위기를 선호했다. 이는 청중에게는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자신에게는 악보 그 자체에 대한 집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리히테르가 남긴 방대한 양의 레코딩 
레코딩 또한 평생에 걸쳐 엄청난 양을 남겼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지휘자 므라빈스키와 더 많은 녹음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가 칭송해 마지 않았던 카라얀과의 베토벤 [ 3중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비록 당시 해석에는 마음 들어 하지 않았지만)을 비롯하여 지휘자 마타치치와의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과 지휘자 비슬로키와의 [라흐마니노프 2번]을 비롯하여 엄청난 양의 협주곡을 레코딩했다. 전혀 다른 작품들로 80개 이상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고 자랑했던 독주곡 레퍼토리에서는 정리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레코딩이 남아있다. 특히 러시아 레퍼토리, 슈만이나 리스트 같은 낭만주의 시대 작품, 빈 고전파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준 바 있다.
글렌 굴드는 리히테르가 레코딩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없어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많은 녹음을 진행한 베테랑 연주가이기도 한 리히테르는 레코딩의 완성도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많은 양의 라이브 레코딩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데, 이 많은 음반들 어느 하나 리히테르의 카리스마와 진지함이 배어있지 않은 음반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1995년 뤼벡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청력 이상으로 은퇴를 한 리히테르는 2년 뒤인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올리스트 바슈메트의 연주와 지인들의 추모를 받으며 교회에서 간소한 장례식을 거친 그의 유해는 생전에 친분을 나누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의 거장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