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코지 판 투테 - 모차르트

틸 오일렌슈피겔 - R.슈트라우스

피아노 협주곡 - 리스트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 베르디, [운명의 힘]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베르디가 러시아 상크트 뻬쩨르브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의 마린스키극장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쓴 후 49세가 되는 해에 성공적으로 초연했으나, 그 자신은 너무 음산(陰散)하고 막이 끝나는 부분 등에 불만이 있어 7년 후에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려고 초판의 전주곡을 지금의 유명한 것으로 바꾸고 또 제2막 이후도 개정을 했다. 이 개정으로 음악극으로서 한층 다채롭고 명암(明暗)의 대조가 뚜렷하여 듣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작이 되었지만, 본래 우연한 부분이 많은 잡다한 대본 때문에 연극으로서의 약점이 오히려 조장된 점이 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초판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초연 극장에서는 초연을 복원(復元)하는 시도도 있었다. 여기 언급한 것은 개정판대로의 연주이다. 오페라는 전 4막이며 데 사아베드라(Angel de Saavedra)의 1835년 판 희곡을 피아베(Francesco Maria Piave)가 대본으로 썼다.



“죽음만이 나를 편안케 해줄 것입니다.”
스페인 명문 귀족의 딸 레오노라와 잉카 제국의 왕족 피를 이어받은 돈 알바로가 함께 탈출한 날 밤, 권총이 폭발하여 레오노라의 아버지인 후작이 그 희생이 된 사건으로 이 비극의 주역들이 유랑(流浪)의 길을 떠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두 사람을 뒤쫓는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가 또 한 사람의 주역이 된다. 유랑 끝에 수도원에 들어간 알바로는 카를로에게 거처가 탐지(探知)되어 결투를 강요당하고 하는 수 없이 카를로를 찔러 죽인다. 그 후 카를로의 마지막 고백을 들고 임종의 자리를 지켜달라고 문을 두들긴 산속 바위굴에서 레오노라가 나와 다시 만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레오노라는 오빠 곁으로 달려가나 죽어가는 오빠에게 찔려 죽는다.

레오노레 역으로 열창하는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

리히테르 - 피아니스트

리히테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일구어낸 삶과 업적을 하나로 설명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라는 단어만큼은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표현일 것이다. 레코딩을 끔찍하게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음반을 남겼다. 그의 공식적인 디스코그래피는 지금까지도 계속 확장되고 있을 정도로, 정규 레코딩 외에 많은 방송 녹음들과 개인 녹음들이 지속적으로 발매되어 피아노 애호가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자기 홍보를 위한 인터뷰나 영상물 제작을 극도로 혐오(브루노 몽생종이 그의 기록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그의 사생활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열광적인 사진광이었다. 더군다나 인간적으로도 그는 대단히 복합적인 성격으로서 유목민적이고 일중독자에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단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음악 취향에 있어서도 그는 카라얀의 음악 해석에는 이해할 수 없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탐미적이면서도 장중한 해석에 있어서는 늘 찬사를 보냈고, 글렌 굴드의 바흐는 참신하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그 외의 작품에서는 자기도취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러시아인이자 독일인이었던 그는 순진한 동시에 삐딱하기도 했고, 예측할 수 없는 성격임과 동시에 완고하기도 했다.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스핑크스와도 같은 광적인 열기를 자아내다가도 근엄한 사제와도 같은 엄숙함과 어린이와도 같은 천진난만함을 오고간다.



불연속의 연속 - 역설의 오묘한 조화

역설적일 수록 리히테르에 대한 평론가들과 청중들의 반응은 더욱더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 수록 그에 대한 우상화의 기운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던 그가 서방인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부터,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리히테르의 존재를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마이다스의 손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손 대는 모든 작품들은 철저하게 분석, 재구성되어 ‘리히테르화한 에너지’에 휩쌓인 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항상 기준 이상의 포르테로 일관했지만, 그 포르테는 리히테르 자신에게는 극도의 포르티시모를 위한 작은 피아니시모였던 것이다. 이렇게 쌓아올린 저 엄청난 음향의 구조물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창조적인 힘을 발산했던 리히테르에 대해 어떠한 반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딘가 자신을 속인다는 느낌까지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할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저 넓은 20세기 피아노 세계의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거인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 세 명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거인으로 발돋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꼽는 첫 번째 아버지는 바로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네이가우스가 누구인가? 그는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서 에밀 길렐스, 야코브 자크, 이고르 쥬코프, 안톤 긴스부르그, 엘리소 비르살라제, 알렉세이 루비모프, 라두 루푸 등을 길러낸 현대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라고 말할 수 있다.   

리히테르는 웅혼하고 강건한 음악으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리히테르의 재능을 알아채린 뒤 아버지처럼 그의 곁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고 이끌어주었던 스승으로서, 네이가우스는 낭만적이면서도 부드러우며 상상력 풍부한 옛 피아니즘 성향이 강한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한테는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고 텍스트에 담긴 그 의미와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리히테르의 그 방대한 레퍼토리와 작품에 대한 투철한 분석, 냉정한 감정 조절, 풍부한 상상력은 바로 네이가우스의 아버지와도 같은 넓은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그를 낳아주고 음악으로 이끌어준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고, 세 번째로는 바로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언급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에게 있어서 1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던 정신적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사색하는 음악을 통해 호소력을 이끌어내다

음악은 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사색의 세계다. 소리, 음색, 악기, 악보, 연주자, 작곡가, 그리고 음악. 연주의 기본 이념은 이들 모두를 조화시켜 소리로 표현해 내는 실현행위다. 연주가란 무엇인가? 이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며 모든 요소에 매어져 있는 사슬을 긴밀하게 조여가는 주체다. 리히테르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있다. 순간 속에서 단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바로 그 소리의 깊은 호소력을 끌어낼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다. 그는 음악의 본질을 캐어내는 과정을 피아노를 통해 심사숙고한다. 그 결과 그가 발견하는 것은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연주가 어떻게 그 곡의 본질을 지시할 수 있는 가이다. 자유로운 음악 만들기를 통해 한 순간의 시간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그를 변덕스럽고도 고집스러운 음악가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일 것이다.

참된 음악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낸 전형적인 러시아인인 리히테르는, 러시아 전통 피아니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고전과 낭만, 혁신과 보수, 감성과 이성, 러시아와 유럽, 피아노와 오페라 사이에서 자신만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 작곡가 의도에 충실한 음악세계를 만들어나갔던 리히테르의 연주는 러시아적이라기보다는 구조주의적이었다. 또한 현대적이되 자아도취적인 낭만적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현대적 도취감이 즉흥적 파생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방식을 지키기 위한 고집스러움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엄격한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히테르에 대한 글렌 굴드의 언급만큼 정확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연주를 연결고리로 작곡가와 청중들을 매개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작품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도 보여준다.”



리히테르의 초상
1915년 3월 20일 우크라이나의 지토미르에서 태어난 리히테르는 그리그와 슈레커와 친분이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오르가니스트인 폴란드-독일계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환경을 받을 수 있었다. 시민 혁명 이후 오데사로 가족이 집을 옮긴 뒤 리히테르는 미술과 문학, 영화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의 연주에도 아버지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것만을 배웠을 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워나갔던 그는 14세에 오데사의 한 해군클럽에서 피아노 반주를 시작했다. 15세에는 엄청난 양의 오페라 악보를 읽어나가며 오페라 리허설 반주에 몰두했으며, 18세 무렵에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발레연습 반주를 할 수 있었다.

1934년에는 기본 피아노 레퍼토리를 배우지도 않았고, 전문적인 연습도 없었던 그로서는 대담한 시도라고 말 할수 있는, 쇼팽 리사이틀을 오데사의 기술자 클럽에서 열었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프로 연주자로 발돋음했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반 독일정서로 인해 모스크바로 떠났고, 바로 여기서 피아니스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만나게 된다. 리히테르는 이미 오데사에서 네이가우스의 연주를 듣고 그의 비상하는 듯한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네이가우스와의 만남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1937년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네이가우스 역시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을 도와준다.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자 독일인 아버지를 둔 네이가우스는 후일 리히테르로부터 ‘친숙한 중립성’을 배웠다고 토로한바 있다. 그 만큼 리히테르는 작품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스타일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주관을 객관화시키는데 천부적이었다. 2차대전 중 아버지가 총살을 당하고 어머니는 독일로 떠나버리자, 네이가우스는 리히테르의 아버지의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리고 1942년 6월에는 정식 리사이틀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청중들은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당당한 기운, 엄청난 테크닉에 압도되었다. 1944년 리히테르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련의 각종 연주회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소련의 예술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피아니스트로서 소련 내 최고의 연주자로 손꼽히던 그는 1952년에는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를 소재로 한 영화에 리스트로 분장하고 출연한 독특한 경력 또한 가지고 있다.



철의 장막, 소련에서 벗어나다

리히테르는 스탈린이 서거한 뒤 19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사회적 변화에 부응해, 철의 장막에서 벗어나 서방 세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0년 미국으로의 첫 연주여행(이전에 미국에 선보인 에밀 길렐스가 “리히테르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로 언급한 것은 유명하다)을 떠나 병적일 정도로 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196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있는 전설로서 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음악 외 것들은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1970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의 미국 연주회에서 반공주의자들의 난동으로 연주회가 중단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 연주회를 가지지 않았다. 대신에 동서유럽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왕국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디스코그래피는 지금까지도 확장되고 있을 정도로 정규 레코딩 외에 많은 방송 녹음들과 개인 녹음들이 지속적으로 발매되고 있다.


프로코피에프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리스트와 쇼팽,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와 고전, 현대 및 프랑스 작곡가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포함한 피아노로 가능한 모든 솔로 및 협주곡 레퍼토리가 그의 손끝에서 연주되었다. 그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음악 만들기를 사랑했다. 그 만큼 실내악과 앙상블 작업은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가장 먼저 소비에트 시절 함께 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앙상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이들은 새로운 러시아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해낸 트로이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 그와 절친한 사이었던 벤자민 브리튼과의 연주도 60~70년대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이벤트이고,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가곡 반주자(후일 페터 슈라이어와도 함께 했다)로서의 활동 또한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음악가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 특히 후배 피아니스트인 졸탄 코치슈,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등을 각별히 아끼며 함께 듀오 리사이틀도 열었고,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첼리스트 나탈리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 함께 실내악 연주와 듀오 리사이틀 또한 자주 가졌다. 그리고 전문 실내악 단체인 보로딘 4중주단과도 많은 연주회를 했다. 거구의 몸으로 청중을 압도했던 그는 말년에는 홀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악보를 앞에 놓은 채 건반 옆에 단 하나의 조명만 놓고 연주하는 분위기를 선호했다. 이는 청중에게는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자신에게는 악보 그 자체에 대한 집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리히테르가 남긴 방대한 양의 레코딩

레코딩 또한 평생에 걸쳐 엄청난 양을 남겼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지휘자 므라빈스키와 더 많은 녹음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가 칭송해 마지 않았던 카라얀과의 베토벤 [3중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비록 당시 해석에는 마음 들어 하지 않았지만)을 비롯하여 지휘자 마타치치와의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과 지휘자 비슬로키와의 [라흐마니노프 2번]을 비롯하여 엄청난 양의 협주곡을 레코딩했다. 전혀 다른 작품들로 80개 이상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고 자랑했던 독주곡 레퍼토리에서는 정리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레코딩이 남아있다. 특히 러시아 레퍼토리, 슈만이나 리스트 같은 낭만주의 시대 작품, 빈 고전파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준 바 있다.

글렌 굴드는 리히테르가 레코딩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없어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많은 녹음을 진행한 베테랑 연주가이기도 한 리히테르는 레코딩의 완성도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많은 양의 라이브 레코딩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데, 이 많은 음반들 어느 하나 리히테르의 카리스마와 진지함이 배어있지 않은 음반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1995년 뤼벡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청력 이상으로 은퇴를 한 리히테르는 2년 뒤인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올리스트 바슈메트의 연주와 지인들의 추모를 받으며 교회에서 간소한 장례식을 거친 그의 유해는 생전에 친분을 나누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의 거장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현악5중주 D956 - 슈베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 시벨리우스

슬픔과 눈물 속에 태어나 - 로시니, [라 체네렌톨라]

슬픔과 눈물 속에 태어나

[신데렐라 이야기]는 뻬로(샤를 페로, Charles Perrault, 1628~1703)의 유명한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계모(繼母)와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언니들에게 학대 받는 처녀가 요정(妖精)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임금님 성(城)에 가서 왕자가 첫눈에 반하나 12시까지 집에 돌아온다는 요정과의 약속에 서둘다가 그만 유리 구두를 벗어놓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 유리 구두가 증거가 되어 간악한 언니들을 제치고 왕비로 발탁된다는 것이 대강 줄거리이다. 그러나 로씨니(로시니, 1792~1868)는 이 유명한 동화를 오페라로 만들 때, 유리 구두나 생쥐가 끄는 호박 마차 같은 비현실적인 동화의 요소를 제거하고, 계모는 원작과는 반대로 지금은 죽고 없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인 의부(義父)로, 또 요정은 왕자의 가정교사로 바꾸었다. 로씨니는 그들에게 학대 받는 불쌍한 아가씨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파악하여 오페라 붓화(오페라부파, opera buffa, 가벼운 희극적 오페라)형식으로 다루었다. 그는 다른 오페라 붓화에서는 자칫 부족하기 쉬운 풍부한 정서(情緖)를 그 다운 분명한 템포와 코믹한 약동에 결부시켜, 39개나 되는 그의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매력 있는 작품의 하나로 만들었다. [라 체네렌톨라(Cenerentola, 신데렐라)]는 1817년에 로마에서 초연되었으며 그 전해에 발표한「세빌리아의 이발사」와 함께 로씨니가 창작욕이 제일 왕성하던 시기의 오페라 붓화이다. 동화적인 분위기는 별로 없으나 싱싱한 성격묘사에 걸출한 음악이 매우 신선하다. 훼레띠(Giacomo Ferretti)가 전 2막의 대본을 만들었다.



오페라로 만들어진 신데렐라 이야기
왕자의 가정교사 알리도로는 왕자 돈 라미노의 결혼 상대로는 마음씨 착한 아가씨가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다. 세 딸을 가진 홀아비이며 가난한 돈 마니휘코(Don Magnifico) 남작네 집을 거지로 위장하고 찾아가 보고 체네렌톨라(=신데렐라)라고 불리는 막내 딸 안지올리나의 상냥함이 마음에 들었다. 가정교사의 권유를 받은 라미로는 시종 단디니를 왕자로 변장시켜 돈 마니휘코 집에 찾아가게 한다. 두 언니와 남작은 거짓 왕자에게 속아 있는 아양을 다 떨며 대접을 한다.

그리고 궁전 무도회에 초대되자 체네렌톨라에게 집 잘 보라고 지시하고 떠난다. 한편 가정교사 알리도로는 혼자 남은 체네렌톨라를 찾아가 그녀를 아름다운 공주로 치장하여 궁정무도회에 안내한다. 궁중에서도 가짜 왕자에게 착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돈 마니휘코와 두 딸들. 한편 체네렌톨라는 가짜 왕자의 결혼 신청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다음 날, 라밀로는 체네렌톨라가 떨어트리고 간 팔찌를 들고 마니휘코 남작 집을 방문하여 자기가 진짜 왕자임을 밝히고 체네렌톨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라 체네렌톨라]는 오페라로 만들어진 신데렐라의 이야기다.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 모차르트

이 세상이 덧없음을 아시는 분 - 베르디, [돈 카를로]

이 세상이 덧없음을 아시는 분

교회의 정치 개입, 종주국 스페인의 탄압에서 해방을 꾀하는 훌랑드르(플랑드르, Flandre)의 신교도에 대한 스페인 황태자의 공명(共鳴) 등 16세기 유럽의 정치사를 배경으로 하여, 스페인 황태자 돈 카를로와 사랑하면서 그 아버지 휠리포 2세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불란서의 왕녀 엘리자베타가 겪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또 복잡하게 얽힌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왕비를 모시는 여관(女官)이며 국왕의 애인, 황태자를 은밀히 사랑하는 에볼리 공녀(公女)[여기까지가 역사상의 실존 인물]과 또 한 사람인 원작자 쉴러(Schiller)가 자기 사상의 대변자로 등장시킨 포자(Posa)의 후작인 로드리고이다. 이러한 역사극 속에서 음악의 힘으로 인간관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양을 부각시키는 것은 베르디의 특기이다. 베르디가 53세 때 빠리(파리, Paris)의 제2회 만국 박람회(1867)를 위해 작곡한 이 작품 [돈 카를로]는 1867년 3월 11일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불란서인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추어 발레와 합창이 들어간 그랜드 오페라 형식의 5막극이었으나, 그후 불란서어를 이탈리아어로 바꾼 4막의 개정판(1884)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1886년 삭제했던 제1막을 살리고 오케스트레이션도 고쳐서 5막의 제3판을 남겼다.



음악의 힘으로 인간관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양을 부각시키는 역사극
1560년대의 스페인이다. 전왕(前王) 카를로 5세의 무덤이 있는 마드리드의 산 쥬스트 수도원의 이른 아침에 왕자 돈 카를로는 약혼녀였던 엘리자베타가 지금은 아버지 국왕의 왕비가 되어버린 데 대한 분노와 슬픔을 친구 로드리고에게 알린다. 왕비의 여관(女官)인 미모(美貌)의 에볼리는 남몰래 돈 카를로를 사랑하며 그 뜻을 편지에 적어 보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왕비에게 가 있음을 알고 국왕과 밀통(密通)하며 왕비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알린다. 구교도(舊敎徒)인 스페인 왕은 신교도가 많은 훌랑드르 지방을 탄압한다. 그러나 동정적인 로드리고는 왕에게 사태의 심각함을 직언하고 그에 찬동하는 돈 카를로가 왕에게 간언하지만 왕은 오히려 왕자를 감옥에 넣는다. 책임감 때문에 돈 카를로를 구출하기 위해 감옥에 침입했으나 왕의 부하에게 습격을 받아 돈 카를로에게 훌랑드르의 장래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마지막 막은 산 쥬스트 수도원이다. 돈 카를로는 엘리자베타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훌랑드르로 떠나려고 한다. 그 때 국왕과 종교 재판장 일행이 나타나 불의(不義)의 현장을 포착했다고 하며 왕자를 처형하려 하나, 마침 선왕의 묘가 열리고 일동이 꿇어 엎드리자 왕관을 쓴 수도사가 돈 카를로를 어디론가 데리고 사라진다.

[돈 카를로]는 16세기 유럽의 정치사를 배경으로, 왕자 돈 카를로를 사랑하나 그의 아버지인 왕과 정략결혼한 여인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독일 연가곡 - 클래식 입문 ABC

일 트로바토레 - 베르디

비극적 서곡 - 브람스

하늘과 바다 - 폰키엘리, [라 조콘다]

하늘과 바다

이 작품 [라 죠콘다(라 조콘다)]는 복잡한 줄거리의 멜로드라마이며 신파조여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본국 이탈리아 이외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뛰어난 공연을 만나면 아름답고 친밀감이 있으며 강한 호소력을 지닌 아리아나 중창이 계속 이어진다. 보이토(Arrigo Boito)가 가명으로 쓴 대본도 구성이 확고하고 이를 뒷받침한 작곡가가 여유 있게 드라마를 유지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퐁키엘리(폰키엘리, Amilcare Ponchielli, 1834-1886)는 베르디를 이은 낭만파의 가극 작곡가이지만 베르디보다 일찍 죽었다. 그는 푸찌니와 마스카니의 좋은 스승이었으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가교(架橋)였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들으면 이 그랜드오페라 속에서 다음 세대의 베리즈모 양식의 싹을 느낄 수 있다. 소개할 ‘하늘과 바다’ 이외에 제3막 제2장의 우아한 발레 음악인,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시간의 춤’도 유명한 곡이다.



복잡한 줄거리의 멜로드라마
17세기의 베네찌아(베네치아)이다. 밀고장(密告狀)을 넣는 ‘사자의 입’이 보이는 공작의 저택 중간 정원에서 군중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가수 죠콘다에게 연정(戀情)을 호소하는 재판소의 밀정(密偵) 바르나바는 그녀에게 거절당한 보복으로 눈먼 그녀 어머니 치에르카를 소동(騷動)에 말려들게 한다. 엔쪼(지금은 방랑의 산타 휘오르 공작)와 죠콘다는 그 소동 속에서 치에르카를 구출할 수가 없다. 그때 공작의 저택에서 재판소 장관 알비제가 아내 라우라와 함께 나타나 치에르카가 구출된다. 그녀는 라우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로사리오(rosario, 黙珠)를 준다.

한편, 엔쪼도 뜻밖에 옛날의 연인 라우라를 다시 만난 일에 놀란다. 음흉한 바르나바는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눈치를 알아채고 사람들이 가버린 뒤 엔쪼를 돕겠다고 제의하는 한편 알비제에게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밀고장을 공증인이 쓰게 만든다. 그 사실을 엿들은 죠콘다는 엔쪼의 변심을 슬퍼한다. 바르나바에게 인도되어 엔쪼의 배에 온 라우라는 그와 사랑의 2중창을 부른다. 그러나 배 안에 숨어 있던 죠콘다가 나타나 두 여성은 심하게 말다툼을 한다. 그때 밀고를 받은 알비제 일행의 배가 다가온다.

사태는 급변을 맞아 성모마리아에게 비는 라우라. 그녀의 가슴에 매달린 로사리오를 보고 죠콘다는 라우라가 어머니의 은인이었음을 깨닫는다. 죠콘다는 라우라를 도망치게 하고 엔쪼는 배에 불을 지른다. 알비제는 부정(不貞)한 아내에게 독약으로 죽으라고 한다. 저택에 스며든 죠콘다는 마취제를 마시게 해서 라우라를 가사(假死) 상태에 빠지게 한다. 무도회장에 나타난 엔쪼는 라우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비제에게 도전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제압당한다.

오르화노 운하 가의 집에 가사 상태의 라우라가 죠콘다의 수하 사나이들에게 운반되어 온다. 다른 한편 죠콘다는 바르나바의 뜻을 따르겠다는 조건 아래 엔쪼도 감옥에서 구출한다. 라우라가 되살아나 죠콘다가 준비한 배로 둘은 고마운 뜻을 말하고 떠나간다. 이윽고 바르나바가 죠콘다의 앞에 나타난다. 각오하고 있던 죠콘다는 단도로 자살한다. 놀란 바르나바가 화가 나서 “네 어머니를 죽였다!”고 외치지만 죠콘다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하이페츠 - 바이올리니스트

대공 트리오 - 베토벤

꿈과 같이 - 플로토, [마르타]

꿈과 같이

훌로토(플로토, Friedrich Freiherr von Flotow, 1812-1883)는 독일의 귀족 집에 태어나 주로 빠리(파리)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했으며 중년부터 독일에서 지휘자 및 작곡가로 일했다. 작품은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Alessandro Stradella](1844년, 함부르크), [마르타](1844년 빈)을 비롯하여, 오페라, 오페레타, 발레 등을 통해 무대 작품 약 30개를 발표했고 그 밖의 소수의 실내악이 있다. 생존 중에는 몇몇 작품이 성공하였으나 오늘날 오페라 하우스의 레퍼토리로 남아 있는 것은 [마르타]뿐이다. 1882년 70세의 생일에 [마르타] 공연 500회를 기념하기 위해 빈 궁정 가극장의 초청을 받았다. 훌로토의 오페라는 아름다운 선율로 넘치지만 극적 박력이 약하고 너무 감상적(感傷的)인 점이 약점이다. 이 오페라의 소재는 불란서의 각본가 생 죠르쥬 후작(Vernoy de Saint-Georges, 1801-1875)이 빠리 국립 오페라 극장을 위해 1844년 2월 21일에 초연된 [앙리에뜨 공주 Lady Henriette ou La Servante de Greenwich]이다. 이 발레의 일부를 훌로토가 작곡했으나 오페라 대본은 여기 의거하여 후리드리히(프리드리히, W. Friedrich)가 전 4막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전성기인 빛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낭만적이며 명쾌할 뿐만 아니라, 밝고 유쾌한 독일 코미크 오페라의 걸작으로 꼽힌다.



밝고 유쾌한 독일 코미크 오페라의 걸작
18세기 초(1710년경) 앤(Anne) 여왕 시대의 영국 요크셔주 리치몬드 근처이다. 여왕의 시종(侍從)인 해리에트는 궁중의 무료(無聊)한 생활에 지친 나머지 가까운 벗 낸시와 함께 농민의 딸로 가장하고 사촌 오빠 트리스탄과 어울려 시장에 나간다. 일꾼으로 나타난 부농(富農)의 젊은이 플런케트와 그의 의붓동생 라이오넬을 만난 두 아가씨는 사촌인 트리스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용계약을 맺는다. 그녀들의 가명은 해리에트가 마르타, 낸시는 율리아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라이오넬은 마르타에게, 플런케트는 율리아에게 반한다. 그러나 트리스탄이 보낸 마차를 타고 두 아가씨는 도망친다. 그때 여왕이 사냥터에서 돌아온다.

여왕의 시종인 해리에트도 마중을 나간다. “마르타!” 하고 부르는 라이오넬의 목소리에도 모른 척한다. 오히려 미치광이 취급을 당한다. 그를 구하기 위해 플런케트는 라이오넬이 갖고 있던 반지를 여왕에게 보이고 바로 그가 더비 백작의 자식임이 판명된다. 해리에트는 라이오넬에 대한 사모(思慕)와 후회 때문에 그를 찾아가지만 사람을 믿지 않게 된 라이오넬은 만나주지 않는다. 플런케트의 꾀로 마르타와 율리아의 모습으로 관계자 모두가 모였다. 그날의 시장을 복원한다.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마르타” 하고 외치며 두 사람의 사랑은 되살아난다. 플런케트와 낸시도 맺어져서 모든 것은 해피엔드로 끝난다.

오페라 마르타의 한 장면을 그린 삽화 (Andreas Geiger, 1848년 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마스카니

어느 날 밤, 깊은 바닷속에 - 보이토, [메피스토펠레]

어느 날 밤, 깊은 바닷속에

괴테의 시극(詩劇) [화우스트 (Faust, 파우스트)]를 원안(原案)으로 하여 무대화한 작품은 많다. 그러나 제2부까지 넣은 일은 드물다. 보이토가 바그너 음악의 영향 아래(그는 바그너 악극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다른 작곡가들과는 색다른,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메휘스토휄레(Mafistofele, 메피스토펠레)]는 대담한 수법과 극적 통일을 꾀한 웅대(雄大)한 역작(力作) 오페라이다. 그러나 밀라노 초연판은 하룻밤 상연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결국 오늘날 흔히 공연되는 볼로냐 개정판에 낙착하게 된다. 보이토는 오히려 오페라의 유명 대본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퐁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의 [라 죠콘다 (라 조콘다, La Gioconda)], 베르디 만년의 걸작 [오텔로], [활스타후(Falstaff, 팔스타프)]의 대본을 쓴 사람이다.



괴테의 원작에 가장 충실한 오페라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가 숱한 [화우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원작에 충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괴테의 희곡을 제2부까지 오페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페라의 주역은 메휘스토휄레이다. 과연 구노의 [화우스트]의 메휘스토휄레스와 비교하면 이쪽이 훨씬 악역(惡役)이다. 구노식의 메휘스토휄레스는 마치 신사처럼 활발하게 나타난다. “허리에는 칼.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지갑은 두둑해, 어깨에는 멋진 망토를 걸치고 있어, 말하지면 정말 신사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는 나쁜 천사이다. 유명한 휘파람의 아리아 ‘나는 악마다!’로 자기소개를 하지만 꽤 까다롭다. “나는 악마다. 별이건 꽃이건, 언제나 모든 것을 부정(否定)한다. 내 비웃음과 적의(敵意) 덕분에 창조주는 쉴 날이 없다. 내 소망은 무(無)이다. 즉 창조물의 완전한 파괴이다.” 보이토의 메휘스토휄레는 음악이라는 면에서도 기괴(奇怪)하여 넓은 음역(音域)이 요구된다. 보이토는 베르디와는 완전히 다른 미학으로 작곡을 했으나 베르디가 발전시킨 성격적인 베이스 역의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16세기의 독일과 고대 그리스이다. 천상(天上)의 세계에서 악마 메휘스토휄레가 늙은 철학자 화우스트를 유혹할 것을 도전(挑戰)적으로 선언한다.

[제1부] 부활절의 일요일에 후랑크후르트의 거리에 내려온 메휘스토휄레는 화우스트를 발견하고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라고 설득한다. 화우스트도 “잃어버린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을 얻을 수 있으면 죽어도 좋다”고 계약을 한다. 청년의 모습으로 엔리코가 되어버린 화우스트는 아름다운 아가씨 마르게리타에게 접근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미국판에 삽입된 삽화 (Harry Clarke의 그림, 1925년 작)

그의 달콤한 말에 그녀는 수면제를 어머니 마르타에게 먹이고 밀회를 거듭한다. 을씨년스러운 악마들의 향연이 열리는 밤에 쇠사슬에 묶인 마르게리타의 환영(幻影)이 나타난다. 화우스트가 본 환영이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죄와 화우스트와의 사이에 낳은 갓난애를 죽인 죄로 투옥(投獄)되어 착란상태에 놓인다. 그녀를 구출하려고 스며든 화우스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천상에 구제(救濟)되어 간다.

[제2부] 고대 그리스의 달빛이 눈부신 어느 강가에서 미녀 헬레나와 중세 기사(騎士) 모습을 한 화우스트가 도취적(陶醉的)인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다. 후랑크후르트의 화우스트 서재(書齋)에 메휘스토휄레가 다시 나타난다. 유혹하려고 하지만 들은 척도 않고 화우스트는 성서를 들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천사들이 장미 꽃잎 비를 뿌려 장례를 치른다. 패배한 악마는 휘파람을 불며 떠나간다.

카를 뵘 - 지휘자

카를 뵘

우리나라의 갑오개혁 때 태어나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발사되던 해 우리 곁을 떠난 지휘자가 있다. 그의 지휘 레코딩은 78회전 SP로부터 스테레오 녹음에까지 이른다. 지휘자 카를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뵘은 1894년 8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뵘의 부친은 에거란트(독일과 체코의 국경지역) 지역 출신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보헤미안이었고, 모친은 알자스 지방 출신이었다. 뵘은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해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그라츠 슈타츠오퍼의 법률 고문을 맡고 있었던 뵘의 아버지 주변에는 음악계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명이 뵘을 브람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만디체프스키에게 소개해 줬고, 뵘은 빈 음악원 (지금의 빈 국립 음대)에서 만디체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법률가에서 지휘자로 변신하다
1917년 그라츠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한 뵘은 상임지휘자 자리를 약속받는다. 당시 바그너의 친구였던 카를 무크는 뵘이 지휘한 바그너 [로엔그린]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당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 브루노 발터에게 뵘을 소개했다. 발터는 1921년 뵘을 초청해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지휘대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뵘은 발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와 주고받은 모차르트에 대한 견해는 뵘을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 주었다. 1922년부터는 발터의 후임으로 한스 크나퍼츠부쉬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크나퍼츠부쉬 역시 모차르트 레퍼토리는 거의 모두 뵘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이후 젊은 뵘의 지휘 포스트는 다름슈타트로 옮겨졌다.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뵘은 이때 총감독이었던 루돌프 빙과 만난다. 훗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이 되는 빙과 뵘의 우정은 이때부터 평생동안 계속됐다.

1931년부터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으로 지휘 활동을 전개한 뵘은 1934년에는 프리츠 부쉬의 뒤를 이어 드레스덴 젬퍼 오퍼의 총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절 그는 현대 오페라를 선보이는 데 힘썼다. 특히 알반 베르크 [보체크]를 지휘해 찬사를 받았으며 작곡가 베르크와도 친밀함을 유지하며 베르크 작품을 전세계로 널리 알렸다. 부르크 시절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가까이 지냈던 뵘은 드레스덴 시절 작곡가의 [말없는 여인]을 초연했고 1938년 작곡가가 뵘에게 헌정한 [다프네] 역시 세계 초연했다. 1944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80세 생일을 기념해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지휘하기도 했다.

뵘은 빈 슈타츠오퍼의 수석지휘자 역할을 수행하다가 1943년에는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그는 빈에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를 비롯한 재능있는 가수들을 차례로 발견해 전설적인 ‘뵘 패밀리’를 만들어냈다. 또한 1945년 당시 독일에 합병됐던 오스트리아에서 프란츠 샬크를 이어 ‘오스트리아 음악총감독’의 칭호를 받았다. 독일-오스트리아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나치 협력과 관련해 연합군으로부터 2년동안 연주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지만 1947년에 복귀하게 된다. 그 이후 뵘의 커리어는 발전일로였다.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으며 빈 필하모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도 오랜만에 재회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대지휘자 카를 뵘

1954년 두번째로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에 취임한 뵘은 1955년 11월 연합군의 폭격에 불타버린 빈 슈타츠오퍼 극장 재건 기념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이어서 모차르트 [돈 조반니], 베르크 [보체크], R.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을 지휘했다. [돈 조반니]는 원래 브루노 발터에게 지휘를 요청했었지만 고령으로 쇠약해진 발터가 뵘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직을 사임한 후 뵘은 특정 오케스트라에 머물지 않고 프리랜서 지휘자로 객원 지휘와 녹음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중의 한 명으로 군림하다
1957년 뵘은 [돈 조반니]를 지휘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데뷔했다. 그는 루돌프 빙이 메트 총감독으로 있던 시기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뵘은 메트 무대에서 262번이나 지휘했는데 그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와 [그림자 없는 여인](새 공연장 링컨 센터에서의 첫 번째 성공작)의 초연을 비롯하여 베토벤 200주년을 기리기 위한 [피델리오], [피가로의 결혼], [트리스탄과 이졸데](1959년 비르기트 닐손 메트 데뷔 콘서트), [파르지팔], [로엔그린], [오텔로], [장미의 기사], [살로메], [보체크], [엘렉트라] 등이 있다.

196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첫 등장한 뵘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며 예술감독 빌란트 바그너와 함께 새로운 바이로이트 양식을 창조했다. 1966년과 1967년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뵘의 실황은 [니벨룽의 반지] 음반(Philips)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DG)으로 만들어져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1964년 제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음악총감독의 영예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빈 필 창립 125 주년을 맞아 설립된 ‘명예 지휘자’ 칭호를 수여 받았다.

1973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젊은 지휘자에게 수여하는 ‘카를 뵘 상’을 제정했다. 이밖에도 뵘은 함부르크 필 명예지휘자, 런던 심포니 계관지휘자, 빈, 그라츠, 잘츠부르크 시의 명예시민이었고, 독일연방공로십자훈장, 바이로이트 황금명예반지를 수상했다. 또 그에게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다름슈타트 슈타츠오퍼 명예회원, 베를린 도이치 오퍼 명예회원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만년의 뵘은 197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참가를 시작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의 펠젠라이트슐레 옆의 음악홀 이름은 그를 기려 ‘카를 뵘 잘’로 명명되었다. 그는 1981년 8월 14일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런던 심포니 회장(President)직을 유지했다.

뵘의 사망 소식은 전세계 음악계에 충격이었다. 카라얀은 연주회에서 연주에 앞서 추도의 말을 전했고 모차르트 [프리메이슨을 위한 장송 음악]을 연주했다. 제임스 레바인은 모차르트 [레퀴엠]을, 아바도는 [마태수난곡]을 연주해 뵘의 가는 길에 바쳤다. 베를린 필은 뵘이 지휘할 예정이었던 연주회에서 대타 지휘자를 세우지 않고 지휘자 없이 콘서트를 거행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이겐 요훔, 게오르그 솔티 등도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뵘을 위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무덤이 있는 빈 중앙묘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유족들의 희망에 따라 그라츠의 슈타인펠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카를 뵘(왼쪽)과 뉴욕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가운데)의 만남



나치 동조의 의혹과 정치적 성향

뵘은 초창기 나치에 동조한 혐의를 받기는 했지만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에 의하면 1923년 뵘은 뮌헨 오페라 극장에서 리허설을 멈추고 히틀러의 뮌헨폭동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1930년 뵘의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뵘은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즈음 뵘은 콘서트 도중 ‘하일 히틀러’ 경례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치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적 투표를 실시했을 때 “우리 총통(히틀러)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는 자는 독일의 영예로운 이름을 지닐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고 평론가 레브레히트는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는 못했다.

드레스덴에서 음악감독을 하던 시절 뵘은 나치 정권과 그 문화정책을 찬미하는 발언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1939년 뵘은 독일 예술인 조합 신문에 히틀러 50회 생일을 기념하는 축사에서 “교향악 작품의 범주 내에서 현대음악의 향방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제시하고 그 길을 닦았다”고 기고했다. 한편, 나치는 뵘이 채택한 현대음악 작품을 탐탁치 않아했다. 뵘이 나치에 반대하는 연출가, 무대미술가와 거리낌없이 공동작업 하는 모습도 싫어했다. 뵘의 이러한 행동은 나치 치하에서 예술적 자유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시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역사가 마이클 H. 케이터는 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치에 대한 저항이냐 동조냐 공헌이냐의 사이에서도 여러 상충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치냐 나치가 아니냐로 결정적인 낙인을 찍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음악만을 향한, 소박한 지휘
뵘의 지휘 동작은 언제나 소극적이었다. 좋게 말해도 결코 맵시있는 지휘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카라얀 스타일의 지휘와 달리 외부적인 효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음악이 요구하는 내용만을 지휘에 담는 것에 몰두한 결과다. 카라얀이 뵘의 85세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옛 선승은 화살을 쏠 때 ‘내가 화살을 날린다’고 말하지 않고 ‘화살이 난다’고 했습니다. 무위의 경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뵘의 지휘는 ‘음악이 샘솟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뵘을 따라서 연주가 저절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뵘 지휘의 매력은 악보에 충실하며 작곡가의 의지에 따르려는 노력과 각각의 음악작품 하나하나의 템포를 어떻게 가져가는가, 그리고 피날레의 절정에서 어떻게 모든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확실히 결정돼 있는 상태로 지휘에 임한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만년이 되어서 더욱 성숙해진 뵘의 해석에서 보면 선율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2바이올린 섹션이나 비올라 섹션을 두텁게 가져가는 연주가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꾸밈없고 소박한 지휘. 뵘의 지휘봉은 음악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실제 연주에서의 뜨거운 교감도 뵘 지휘의 장점이다. 청중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 없이 펼치며 연소도 높은 연주를 펼치는 뵘이기에, 2000년대 이후 Altus나 Palexa 등 레이블에서 발매된 라이브 음원이 그동안 다 보여주지 못한 뵘의 진면목을 노출하며 더욱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겠다.

무대 위에서 뵘이 보여준 엄격한 태도는 가수와 단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의 특성에 연연하지 않고 계획대로 연습에 몰두했다. 단원들에게 전달할 때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적 리듬, 다이내믹, 음정 등을 날카롭게 지적했고, 음악의 토대를 탄탄하게 굳혀가며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한다. 뵘의 표현은 아주 솔직했고 때로는 독설을 섞어가며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그를 심술궂은 지휘자로 파악한 단원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박하고 절제된 지휘동작으로 우직한 음악을 만들어낸 지휘자 카를 뵘


그러나 뵘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음악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빈 필의 명 콘서트마스터 게르하르트 헤첼 등 실력 있는 단원들이 뵘에게 보낸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다. 오페라 무대에서 뵘에게 인정받아 이른바 ‘뵘 패밀리’로 불리던 가수들은 뵘이 지휘하는 오페라 제작에서 연습에서 실전까지 일관성을 띠고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연주 상태를 실현해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 오페라 최고의 가수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카라얀 지휘 오페라에도 단골로 출연했다.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리자 델라 카사, 에디트 마티스, 에디타 그루베로바, 루치아 폽, 비르기트 닐손, 귀네트 존스,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드비히,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 볼프강 빈트가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발터 베리 등이 ‘뵘 패밀리’에 속한다.



뵘이 남긴 방대한 레코딩 유산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DG에서 1960년대 모차르트 교향곡 전집과 빈 필을 지휘하여 1971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남긴 것은 뵘의 큰 업적이다. 1955~1956년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지휘 로열 필이 첫 테이프를 끊기는 했지만 뵘이 견고한 리듬으로 이끈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곡 녹음은 클래식 음악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또 뵘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분야는 오페라였다. 특히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 피리] 등은 놓칠 수 없는 일류의 해석이다. 테너 페터 슈라이어는 뵘의 [코지 판 투테]를 극찬하고 “다른 지휘자 아래서는 이 정도의 감격을 맛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971년 빈 필과 녹음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죽음을 앞둔 모차르트의 진심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깊이 있는 해석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외에도 뵘이 해석한 슈베르트,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들은 한질의 교과서로 평가된다. 소박하고 우직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 고전적 조형감이 뛰어난 브람스 교향곡들은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할 음반들이다. 뵘의 활기있고 꾸밈없는 바그너 해석 방식은 헤아릴 수 없는 지지자들을 낳았다. 비르기트 닐손은 "지금까지 33명의 지휘자와 함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노래했지만, 그 누구도 뵘에 비견할 만한 분은 없었다"고 쓰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에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뵘이 음악사에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다. 뵘은 자신에게 헌정된 슈트라우스 오페라 [말없는 여인](1935), [다프네](1938)의 초연을 이끌었으며, 슈트라우스 주요작들을 모두 녹음했다(가끔 스코어에 삭제를 가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물론 빈과 드레스덴에서 지휘할 무렵 정기적으로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강력한 캐스팅으로 공연하곤 했다. 뵘의 슈트라우스 해석은 루돌프 켐페의 지휘와 더불어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중적이지 않은 분야이긴 하지만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룰루] 등이 오늘날 같은 명성을 얻기 이전부터 뵘은 최고의 해석가로 인정받았다.